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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갑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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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와 프랑코가 공존하는 스페인
그 가장 큰 이유는 역사의 쓰레기통을 뒤져 먹고 살려는 선동적 정치인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2005년 가을 필자가 尙美會(상미회) 여행단과 함께 버스를 타고 마드리드 근교의 펠리페 2세 궁전 에스코리알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에스코리알 바로 옆 돌산 꼭대기엔 높이 140m의 세계최대 돌십자가가 박혀 있고 이 바위산 속으로 동굴처럼 생긴 스페인 內戰 희생자 묘지가 파여 있다. 우리 버스가 진입로로 우회전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깃발을 흔드는 차량 행렬이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거의 젊은이들이었다. 다음날(20일)이 프랑코 사망 30주년인데, 그의 무덤이 있는 돌산 동굴로 몰려가는 지지자들의 행렬이었다.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하러 가듯이 독재자를 추모하러 가는 선진국의 젊은이들!
 
  그 며칠 사이 스페인 언론들은 프랑코의 功過(공과)를 다루는 특집 기사들을 내보냈다. 한 신문은 ‘그는 독재자인가, 국민 영웅인가’라는 제목을 달았다. 프랑코가 1936~1939년 사이 스페인 내전을 주도하고 수십만 명을 죽게 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높은 편이었다.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켜 좌파 정부를 타도하지 않았더라면 스페인은 공산화되고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에서부터, 프랑코가 生前에 지금의 카를로스 王을 후계자로 키워 死後의 민주화를 준비하였다는 好評도 있었다. 스페인 언론은 특히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스페인이 독일, 이탈리아 편에 서지 않았던 사실을 지적, 이 결단으로 오늘의 스페인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스페인의 운명을 결정한 프랑코-히틀러 회담이 열린 것은 1940년 10월23일이었다. 당시 독일은 폴란드에 이어 6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하고 공군력으로 영국을 공격 중이었다. 유럽 정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하던 시기였다. 이 힘을 배경으로 히틀러는 프랑코를 설득, 독일 편에 서도록 하려고 스페인 국경에 인접한 프랑스의 한적한 도시로 그를 불렀다. 프랑코는 기차를 연착시켜 히틀러를 기다리게 하였다. 심리전을 쓴 것이다. 회담에서 프랑코는 히틀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참전 조건을 제시하였다. 히틀러가 스페인 內戰 때 자신을 도와준 데 감사하면서도 영국을 치기 위한 동맹에 들어오라는 히틀러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프랑코는 영국은 비록 고립되었으나 막강한 해군력을 믿고서 미국의 뒷받침을 받아 끝까지 버틸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언하였다. 종일 걸린 회담에서 프랑코는 히틀러의 압박을 견디어냈다. 회담이 소득 없이 끝난 뒤 히틀러는 측근들에게 이렇게 불평하였다고 한다.
 
  "저 자와 회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생이빨 서 너 개를 뽑는 게 낫겠다."
 
  만약 이때 프랑코가 독일 편을 들기로 결정하였더라면 스페인은 독일, 이탈리아처럼 패전국이 되고 그는 戰犯으로 단죄되었을 것이다. 스페인은 2차 대전 중 중립국으로 남았다. 戰後엔 미국과 손을 잡고 소련에 맞서면서 경제개발에 성공하였다.
 
  프랑코 사망 30주년이 되는 날 나는 마드리드의 소피아 미술관 2층 6호실에 있는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GUERNICA)’ 앞에 섰다. 이 흑백 大作은 反프랑코=反戰의 상징적 그림이다. 공산당에 입당했던 피카소는 스페인 內戰 때 공화파의 부탁을 받고 1937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 출품할 그림을 구상하고 있다가 나치 공군이 스페인 북쪽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名作을 그렸다.
 
  피카소는 생전에 스페인이 민주화 된 뒤에 이 그림을 조국에 가져가서 전시하도록 유언했었다. 그 사이 이 그림은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게르니카’는 1981년에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으로 왔다가 소피아 미술관으로 옮겼다.
 
  죽은 아기를 안고 부르짖는 어머니, 말, 소, 부러진 칼의 이미지가 보는 이들을 생각 속으로 밀어 넣는 이 그림에 대해 이런 評이 있다.
 
  “고야는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사실적으로 그렸으나 피카소는 전쟁의 본질과 의미를 추상화하여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 이미지를 만들었다.”
 
  스페인은 프랑코와 피카소를 다 포용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역사의 쓰레기통을 뒤져 먹고 살려는 선동적 정치인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조갑제닷컴 대표>
[글쓴이 : 趙甲濟]  201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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